교동인군 관국 (喬桐印君 觀國)이 나와 함께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세보(世譜)를 가지고와서 그의 먼 조상이신 초당공(草堂公)의 사적을 말하며 나에게 묘비명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위선사에 사양할 수 없어서 받아서 펴보니 공의 이름은 빈이시고 자(字)는 봉약(封若), 초당(草堂)은 별호였다.
고려 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시매 이 과거에서는 명사들이 많아서 그때의 사람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인종때에 한림학사와 문하시사였고 돌아가시매 함령(咸寧=지금 상주군 함창면) 서쪽 나한산(지금 나한산) 손향(동남향)이시다. 공께서 때를 잘못 만나 함창으로 귀양오셨다가 돌아가지 못하였다.
후손이 있으니 고종때에 이르러 오대손(五代孫) 대신(大紳)과 육대손(六代孫) 공수(公秀)가 벼슬이 모두 훌륭하였고 팔대손(八代孫) 당은 공민왕때 석성부원군에 봉(封)해졌다. 또 내려와서 십대손(十代孫)에 이르러서는 영보(榮寶)와 중수(重秀)와 인기(仁奇) 세 형제가 또한 훌륭한 영예를 얻었고 이씨조선(李氏朝鮮)에 들어와서는 사휴(士休)가 참찬관(參贊官)이요 복용(福庸)은 예문제학(藝文提學)으로서 이에 더욱 현달한 후손들인 것이다. 그 이하는 많으므로 모두 기록치 않노라.
인씨(印氏)의 성(姓)이 교동에서 나왔는데 시조의 이름은 서(瑞)로서 진(晉)나라 혜제때 신라로 사신을 나왔다가 교동백(喬桐伯)에 봉해졌었으니 우리나라에 인씨가 있음이 이로부터였고 팔백년을 내려와서 고려때(勝國)에 의(毅), 양(亮), 숙(淑) 삼대가 연이어 인종을 섬겨서 벼슬이 모두 훌륭하였으니 이분들이 즉 公의 아버지요 조부요 증조이신 것이며 公도 또한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인하여 교수(喬樹= 즉 喬桐舊號)로써 본관을 얻게 되었다.
다행히 쌍명재 이인노(李仁老)와 사가 서거정(徐居正)께서 公의 추우시(秋雨詩)를 기록하여 훌륭하다고 찬양하였으니 이들 두분은 모두 대문장가로서 앞뒤의 세대에서 이름이 쟁쟁하였던 분들이시매 이분들의 말씀을 빌건대 이태백과 소동파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족히 公의 사실을 증거하여 쓰노라. 묘갈에 명(銘)하여 이르노니 [한점의 고기로 솟 전체의 맛을 알 수가 있고 금싸래기는 많지않은 분량이라도 귀한 것이다. 천년의 후세에서도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두분의 이름난 노대가들(이인노 서거정) 이로다]
▶ 정의묵(鄭宜默) 정의묵 선생의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양관대제학을 지내신 문장공 우복 정경세公의 봉사손(奉祀孫)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와 경연참찬관을 지내신 분입니다.
인빈의 시(詩)
草堂秋七月 桐雨夜三更 衾枕客無夢 隔窓蟲有聲 淺莎翻亂滴 寒葉酒餘淸 自我有幽趣 知君今夜情
- 쌍명재 이인로의 破閑集 中에서 -
초당추칠월 (草堂秋七月) 초당 가을 칠월에 동우야삼경 (桐雨夜三更) 오동잎 듣는 비 밤은 삼경인데 금침객무몽 (衾枕客無夢) 베개에 비긴 나그네 꿈 못 이루고 격창충유성 (隔窓蟲有聲) 창밖엔 들리거나 벌레 소리 천사번란적 (淺莎翻亂滴) 얕은 잔디는 어지러이 젖어 번득이고 한엽주여청 (寒葉酒餘淸) 싸늘한 잎 비 맞고 말쑥하네 자아유유취 (自我有幽趣) 나에게도 그윽한 자취가 있어 지군금야정 (知君今夜情) 그대의 오늘 밤 심경 알겠네 인빈 作 - 이인로의 파한집 중에서 -
이 시 한 수로 학사 인빈은 문명(文名)이 해동제일이라는 평과 함께 “명성(名聲) 밑에 허사(虛士)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글은 인빈이 공암현(양천의 옛 이름)에서 행주까지 배를 타고 가다 지은 시로 알려지고 있다.